지난 장에서 저는 여러분과 함께 하루라는 밥상을 차려 보았습니다. 일 8시간, 배움 8시간, 쉼 8시간. 티옴타 하루의 세 끼를 골고루 차리자고, 잠들기 전 스스로에게 세 가지를 물어보자고 약속했지요. 그러니 오늘은 그 약속에서부터 다시 시작하고 싶습니다.
어젯밤, 잠자리에 누우셨을 때 마음이 편안하셨나요. 하루를 잘 살았다는 따뜻한 충만함으로 눈을 감으셨나요. 아니면 무언가에 쫓기듯, 가슴 한구석이 허전한 채로 천장을 바라보셨나요.
저는 압니다. 이 물음 앞에서 많은 분의 마음이 살짝 움츠러든다는 것을요. "8시간씩이라니, 그게 정말 가능한 이야기인가" 하고 고개를 가로젓고 싶으실 겁니다. 일에 치여 사는 분이라면 쉼과 배움이 통째로 사라졌을 테고, 은퇴 후 무력감에 잠긴 분이라면 일이라는 기둥 하나가 빠지면서 하루 전체가 흔들렸을 테니까요.
그래서 이번 장에서는 약속을 지키려 합니다. 지난 장이 세 끼의 밑그림을 그렸다면, 이번 장은 그 세 끼를 실제로 어떻게 차려 내는지, 손에 잡히는 이야기를 나누는 자리입니다. 미리 한 가지만 말씀드리지요. 균형을 되찾는 일은 여러분이 두려워하시는 것보다 훨씬 따뜻하고, 훨씬 가깝습니다. 이미 여러분 삶 속에 놓여 있던 것들을 조금만 다르게 바라보는 것만으로도, 놀랍도록 많은 것이 달라집니다.
자, 그러면 첫 끼부터 차려 보겠습니다.
우리가 '일'이라 부르는 것은 무엇일까요. 직장에 나가 책상 앞에 앉아 있는 시간만을 가리키는 말이 아닙니다. 자녀를 정성껏 기르는 손길, 작은 가게를 꾸려 가는 부지런함, 교회나 절에서 묵묵히 섬기는 봉사, 텃밭의 흙을 만지며 제 손으로 무언가를 길러 내는 그 모든 활동이 다 '티(Ti)', 곧 일입니다. 세상에 무언가를 더하고 가치를 낳는 시간이라면, 그것이 무엇이든 훌륭한 일이 됩니다.
그런데 제가 오래 들여다보며 깨달은 것이 하나 있습니다. 일에서 정작 문제가 되는 것은 '양'이 아니라 '깊이'라는 사실입니다.
우리는 곧잘 "오늘 여덟 시간 일했다"고 말합니다. 하지만 그 여덟 시간 가운데, 정말로 깊이 있게 마음을 모은 시간은 얼마나 될까요. 휴대폰이 울리고, 메일 알림이 떨어지고, 옆자리의 잡담이 끼어드는 사이사이로 우리의 정신은 자꾸만 흩어집니다. 한 가지에만 온전히 마음을 모을 수 있는 연속된 시간이 점점 짧아집니다. 그래서 겉보기에는 여덟 시간을 꼬박 채웠어도, 마음으로는 두 시간 남짓 일한 것 같은 허전함이 남지요. 다들 한 번쯤 겪어 보셨을 겁니다.
그렇다면 일을 어떻게 회복할까요.
하루 가운데 한두 시간이면 충분합니다. 휴대폰을 잠시 다른 방에 두시고, 메일 알림을 꺼 두세요. 그리고 한 자리에서, 오직 한 가지 일에만 마음을 모으는 시간을 만드세요. 흩어지지 않고 한곳에 정신을 모으는 이 시간을 두고 흔히 '깊은 일'이라 부릅니다. 신기하게도 이렇게 모은 한 시간이, 산만하게 흘려보낸 네 시간보다 더 단단한 결실을 맺습니다. 손으로 정성껏 빚은 그릇이 기계로 찍어 낸 물건과 사뭇 다르듯, 정신을 모은 일과 흐트러진 일은 그 깊이가 아주 다릅니다.
은퇴하신 분들은 어떨까요. "이제 할 일이 없다"고 말씀하실 때, 저는 그 마음 깊은 곳을 가만히 헤아려 봅니다. 그것은 일을 잃어서라기보다, 삶의 목적을 잃은 허전함일 때가 많습니다. 예전에는 월급이라는 분명한 이유가 있었고, 출근이라는 정해진 시간이 있었지요. 하지만 그 자리가 비었다고 해서, 여러분의 손이 할 수 있는 일까지 사라진 것은 결코 아닙니다.
이 모두가 어엿한 '일'입니다. 중요한 것은 단 하나, 누군가에게 보탬이 되고 세상에 가치를 더하는 시간이 내 하루에 얼마나 있는가입니다. 월급이 따르지 않아도, 꼭 해야만 하는 일이 아니어도, 아무도 지켜보지 않아도 좋습니다. 여러분이 손수 차릴 수 있는 일의 밥상은 여전히 풍성합니다.
〔오늘의 점검〕
시니어 여러분, 혹시 이런 말을 들어 보셨나요. "은퇴하면 책이나 느긋하게 읽고, 좋아하는 취미나 하면서 편히 살아야지." 듣기에는 더없이 좋은 말입니다. 하지만 여기에 자그마한 함정이 하나 숨어 있습니다.
배움은 결코 쉼이 아닙니다.
책은 편안한 의자에 앉아 읽을 수 있지만, 책장을 넘기는 내 정신만은 또렷이 깨어 있어야 합니다. 새로운 것을 받아들이고, 그것을 내가 살아온 경험과 이어 보고, 그렇게 나를 조금씩 바꾸어 가는 능동적인 일이기 때문입니다. 손가락 하나만 까딱하면 되는 것처럼 편해 보여도, 마음만은 부지런히 씹고 음미하고 있는 셈이지요. 영화를 멍하니 흘려보는 것과, 한 장면 한 장면을 곱씹으며 보는 것이 전혀 다른 것처럼요. 앞 장에서 저는 배움을 두고 "입으로 들이되 정신으로 씹는 시간"이라 했습니다. 바로 그 뜻입니다.
그리고 혼자 가만히 읽는 것보다, 배움을 함께 나눌 때 그 기쁨이 한결 풍요로워집니다.
그렇다면 배움을 어떻게 회복할까요.
첫째, 모임에 나가 보세요. 같은 것을 좋아하는 사람들과 함께하면, 혼자 할 때보다 훨씬 깊이 배우게 됩니다. 그림을 그리든, 악기를 더듬더듬 익히든, 역사를 함께 공부하든, 성경이나 불경을 둘러앉아 읽고 나누든 좋습니다. 함께라는 온기가 배움을 오래가게 합니다.
둘째, 배운 것을 나누세요. 손주에게 옛이야기를 들려주다가 함께 역사책을 펼쳐 "할아버지 어릴 적엔 어땠을까" 물어보는 것도 훌륭한 배움입니다. 내가 아는 것을 누군가에게 건네려 애쓰는 그 순간, 나 자신이 그것을 한층 더 깊이 알게 되니까요.
셋째, 처음 보는 것에 도전해 보세요. 여태 한 번도 해 본 적 없는 것이면 더 좋습니다. 악기든, 그림이든, 외국어든, 손에 익지 않은 스마트폰 다루기든 괜찮습니다. 나이가 들수록 우리 머리는 새로운 자극과 배움을 오히려 더 갈구합니다. 무력감에 잠겼던 분이 새 취미 하나를 익히며 눈빛을 되찾는 일은 결코 드물지 않습니다. 그것은 우연이 아닙니다. 사람의 마음은 끝까지 배우기를 원하도록 지어졌기 때문입니다.
배움 여덟 시간을 빠짐없이 다 채우라는 말씀이 아닙니다. 하루 한두 시간, 새로운 것을 능동적으로 받아들이는 시간이 있는 것만으로도, 그 하루는 한층 깊어집니다.
〔오늘의 점검〕
일도 소중하고 배움도 귀합니다. 하지만 부디 잊지 마세요. 쉼이 모자라면, 아무리 부지런히 일하고 배워도 끝내 번아웃이라는 벼랑 끝에 서게 됩니다.
많은 분이 번아웃의 까닭을 잘못 짚습니다. "일이 너무 많아서 지쳤다"고 말씀하시지요. 하지만 크라우니가 들여다본 번아웃의 진짜 뿌리는 조금 다른 곳에 있습니다. 그것은 쉬고 배울 시간을 일이 빼앗아 갔기 때문에 찾아옵니다. 밥상에 비유하자면 이렇습니다. 아침을 든든히 먹고 점심을 푸짐하게 차린 사람이 저녁을 매일 거른다면, 그 몸은 머지않아 비명을 지를 것입니다. 일이 많아서가 아니라, 회복할 한 끼를 놓쳤기 때문입니다. 이 이야기는 다음 장에서 더 깊이 파 내려갈 테니, 오늘은 쉼의 세 가지 모습을 먼저 차려 보겠습니다.
쉼의 첫째, 무엇보다 으뜸은 잠입니다.
충분한 잠은 사치가 아닙니다. 잠은 하루의 피로를 말끔히 씻어 내고, 머리가 그날 배운 것들을 차곡차곡 정리해 비로소 내 것으로 갈무리하는 더없이 소중한 시간입니다. 잠을 줄여 가며 일과 배움만 좇는 것은, 아침과 점심을 든든히 먹겠다며 저녁을 날마다 거르는 것과 똑같습니다. 당장은 버틸 만해도, 길게 보면 자신을 야금야금 갉아먹는 일이지요.
쉼의 둘째는 몸의 회복입니다.
아침 산책이 주는 위안은 얼마나 따뜻한지요. 가볍게 걷는 것만으로도 어제의 피로가 스르르 녹아내립니다. 규칙적인 운동, 따뜻한 물에 몸을 담그는 목욕, 좋아하는 음악을 들으며 손을 가만히 놀리는 시간. 이 모두가 어엿한 쉼입니다. 몸이 풀리면 마음도 절로 차분해집니다.
쉼의 셋째는 마음의 회복입니다.
기도나 명상은 흐트러진 마음을 한곳에 고요히 모으는 시간입니다. 소리 없는 조용한 자리에 앉아 숨을 천천히 고르며 하루의 소란을 내려놓으면, 마음이 얼마나 가벼워지는지요. 신앙이 있는 분은 기도로, 종교가 없는 분은 명상이나 음악으로, 또는 마음 맞는 이와의 도란도란한 대화로도 충분합니다.
그리고 쉼의 가장 따뜻한 모습은, 가족과 둘러앉은 밥상입니다.
밥상에 마주 앉아 하루를 나누고, 서로의 얼굴을 바라보며 이야기 꽃을 피우는 시간. 손주를 무릎에 안고 도란도란 속삭이는 그 평온한 오후. 이것이야말로 참된 쉼입니다. 회복이란 혼자만의 편안함을 뜻하지 않습니다. 사랑하는 이들과 함께일 때, 우리 마음은 가장 깊은 곳까지 회복됩니다.
〔오늘의 점검〕
여기까지 읽으시면서 이렇게 생각하신 분이 계실 겁니다. "말씀은 참 좋은데, 내 현실이 그렇게 반듯하게 균형 잡혀 있을 리가 없잖아." 맞습니다. 저도 압니다. 요즘은 누구나 일에 치여 사는 세상이지요. 젊은 분들은 일과 배움 틈바구니에서 쉼을 잃었고, 은퇴한 분들은 어느 날 갑자기 일의 자리가 비면서 삶의 균형 전체가 휘청였습니다.
그래서 여기서 꼭 하나 붙들고 가셨으면 하는 것이 있습니다. 균형이란 완벽을 뜻하는 말이 아닙니다. 매일 칼같이 여덟 시간씩 일하고, 정확히 여덟 시간씩 배우고, 한 치 어긋남 없이 여덟 시간씩 자야 한다는 뜻이 결코 아닙니다.
균형이란, 어느 한 곳도 텅 비지 않은 상태입니다.
한 끼가 부실했던 날이 있어도 괜찮습니다. 다음 날 그만큼 보태면 됩니다. 어제 제대로 쉬지 못했다면, 오늘 그 부족분을 채우면 됩니다. 한 주를 통틀어 보았을 때 일과 배움과 쉼이 대략 고르게 채워졌다면, 그것으로 충분합니다. 아무리 바쁜 한복판에서도, 또 아무리 여유로운 은퇴 후에도, 이 세 가지 모두에 시간을 조금씩이나마 떼어 주는 것. 그것이 참된 균형입니다.
가장 위험한 것은 어느 한 영역이 통째로 0이 되는 것입니다. 일을 아예 손에서 놓거나, 배움을 완전히 접거나, 도무지 쉬지 않는 것 말입니다. 그런데 요즘 세상에서 가장 손쉽게 버려지는 끼니가 바로 쉼입니다. 그리고 그 끝에서 우리를 기다리는 것이 번아웃이지요.
혼자서 이 균형을 지키기가 버겁다면, 함께하세요. 가족과, 교회나 절의 모임에서, 동호회에서 이 세 끼 차리는 일을 나눈다면, 저마다 홀로 짊어질 때보다 훨씬 따뜻하고 환할 것입니다.
이 장을 덮자마자 내일 아침부터 모든 것을 한꺼번에 뜯어고치려 하지는 마세요. 그러다 지쳐 며칠 만에 그만두는 분을 저는 너무 많이 보았습니다. 대신, 오늘 밤 자리에 누우며 가만히 이 세 가지를 스스로에게 물어보세요.
또렷한 답이 나오지 않아도 괜찮습니다. 이 물음을 날마다 되풀이하는 것만으로도, 여러분의 삶은 천천히 균형을 되찾아 갑니다. 한 주를 통틀어 이 세 자리가 대략 채워졌다면, 그것으로 넉넉합니다.
조금 더 헤아려 보고 싶으시다면 balance.crowny.org에 한번 들러 보세요. 일·배움·쉼은 물론, 자산과 관계, 권한과 신뢰까지 내 삶이 얼마나 고르게 균형 잡혀 있는지를 가볍게 비춰 보는 도구가 있습니다. 혼자보다 가족이나 모임에서 함께 점검해 보면, 그 시간이 한결 따뜻하고 뜻깊을 것입니다.
사랑하는 독자 여러분, 우리 삶의 진짜 주인은 다른 그 누구도 아닌 바로 여러분 자신입니다. 누가 시켜서도, 누가 지켜보아서도 아닌, 여러분 스스로가 이 세 끼 밥상을 차려야 합니다. 그리고 차릴 수 있습니다.
어젯밤 잠자리에서 마음이 편치 않으셨다면, 그것은 여러분이 무언가를 놓쳤다는 다정한 신호입니다. 일의 깊이였을 수도, 배움의 기쁨이었을 수도, 회복의 한때였을 수도 있겠지요. 하지만 정말 다행스럽게도, 그것들은 모두 다시 찾을 수 있습니다. 내일부터, 이번 주부터, 아니면 이번 달부터, 서두르지 않고 천천히 되찾으면 됩니다.
그리고 이 균형을 더듬어 가는 길 위에서 우리는 한 가지를 깨닫게 됩니다. 일·배움·쉼이라는 세 가지가, 실은 따로 떨어진 남남이 아니라는 사실을요. 배움이 깊어지면 일도 깊어지고, 넉넉히 쉬어야 비로소 배움도 소화되며, 의미 있는 일을 할 때라야 마음이 진정으로 놓입니다. 세 끼는 서로를 떠받치는 한 식구였던 것이지요.
그런데 여기서 한 가지 물음이 가만히 고개를 듭니다. 우리는 줄곧 "쉼이 모자라면 번아웃이 온다"고 말해 왔습니다. 그렇다면 그 번아웃은 대체 어디서, 왜 오는 것일까요. 다음 장에서는 세 끼의 균형 아래 흐르는 더 깊은 뿌리로 내려가, 번아웃은 왜 오는가—우리가 끝내 지쳐 가는 진짜 까닭을 함께 들여다보겠습니다.
첫 번째 책은 선물이에요. 가입하면 100맘을 드리니까, 두 번째 책부터 자유롭게 읽을 수 있어요. 친구를 추천하면 50맘도 생겨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