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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간을 만드는 사람들 · 일반판

코드가 아니라 시간을 만드는 일 · 전체 6장을 한 번에
일반 · CHAPTER 01

우리가 만드는 것은 코드가 아니라 시간이다

이 책은 한 문장에서 시작한다. 크라우니가 하는 일의 본질은 시간을 만드는 일이다. 언뜻 이상하게 들릴 것이다. 우리가 만드는 것은 분명 소프트웨어인데, 왜 시간이라고 말하는가.

장면 하나를 떠올려 보자. 아침에 브라우저를 연다. 화면이 뜨기까지 잠깐의 멈칫거림이 있다. 우리는 그 멈칫거림을 당연하게 여긴다. 기계란 원래 조금 기다려야 하는 것이라고 배워왔으니까. 운영체제가 깨어나는 데 걸리는 1분, 프로그램이 무겁게 돌아가며 빙글빙글 도는 그 잠깐, 잡무를 처리하느라 흘려보내는 오전 — 우리는 그것을 비용이라고 부르지도 않는다. 너무 익숙해서 보이지 않기 때문이다.

보이지 않는 것을 되찾는 일

크라우니가 만든 도구들은 바로 그 보이지 않는 멈칫거림을 겨냥한다. 크라우니 브라우저는 남들보다 1초 빨리 열린다. 가볍게 설계했기 때문이다. CrownyOS라는 운영체제는 몇 초 만에 깨어난다. 셀이라는 작은 단위로 짜여 있어 무겁게 통째로 일어날 필요가 없다. 크라우니집사라는 업무 도구는 사람이 시키기 전에 잡무를 먼저 치운다. 기다렸다 반응하는 대신, 미리 움직인다.

이 도구들이 공통으로 돌려주는 것은 편리함이 아니다. 편리함은 결과일 뿐이고, 본질은 시간이다. 1초 빨리 열린 브라우저는 당신에게 1초를 돌려준 것이고, 몇 초 만에 켜진 운영체제는 기다림 자체를 없앤 것이며, 먼저 일하는 집사는 당신의 오전 한 자락을 통째로 돌려준 것이다.

강은 폭포에서 시작되지 않는다

사람들은 거대한 것에 감동한다. 거대한 댐, 거대한 데이터센터, 거대한 인공지능. 그러나 강은 큰 폭포에서 시작되지 않는다. 보이지도 않는 산골짜기의 물 한 방울, 또 한 방울이 모여 시작된다. 시간도 그렇다. 우리가 되찾는 시간은 한 번에 1년씩 오지 않는다. 1초, 또 1초로 온다. 너무 작아서 무시당하던 단위들이다.

이 책이 하려는 일은 그 작은 단위를 진지하게 들여다보는 것이다. 1초가 작다는 것은 누구나 안다. 그러나 1초가 모이면 무엇이 되는지는 잘 묻지 않는다. 그 질문을 다음 장에서 산술로 풀어볼 것이다.

모든 이야기가 돌아오는 질문

그런데 시간을 만드는 일에는 함정이 하나 있다. 시간을 되찾았다 한들, 그것을 어디에 쓰느냐는 전혀 다른 문제라는 것이다. 빨라진 기계로 더 많은 일을 욱여넣고, 되찾은 1초로 다시 더 바빠진다면, 우리는 아무것도 만든 것이 없다. 그래서 이 책의 모든 이야기는 결국 같은 질문으로 돌아온다. 그 시간을 어디로 흘려보낼 것인가.

이 질문에 대한 크라우니의 대답은 단순하다. 사랑으로 흘려보낸다. 되찾은 하루로 어머니가 아이 곁을 지키고, 절약된 힘으로 메마른 땅에 물을 대고, 가벼워진 기술로 가장 끝에 선 한 아이가 제 이름을 처음 쓴다. 도구 이야기로 시작한 이 책이 끝내 사람과 사랑의 이야기로 흐르는 것은 그 때문이다. 시간을 만드는 일과 사랑하는 일은, 책의 마지막에서 보겠지만, 사실 같은 동작의 두 이름이다.


일반 · CHAPTER 02

1초 × 수십억 — 작은 단위의 산술

1초는 작다. 너무 작아서, 누군가 당신에게 1초를 선물하겠다고 하면 웃고 말 것이다. 그러나 작은 수에 큰 수를 곱하면 이야기가 달라진다.

세상에는 브라우저를 여는 사람이 수십억 명 있다. 만약 어떤 브라우저가 그 모두에게 1초씩을 돌려준다면, 더해진 시간은 수십억 초가 된다. 수십억 초는 수백 년, 어떤 계산으로는 수천 년에 이른다. 한 사람의 평생은 길어야 백 년 남짓이다. 그러니 모두에게 1초를 돌려주는 일은, 인류에게 여러 생애를 합한 만큼의 시간을 되돌려주는 일과 같다.

이것은 비유가 아니라 산술이다. 작은 수 곱하기 큰 수일 뿐이다. 우리가 1초를 우습게 여기는 이유는 단지 곱셈을 하지 않기 때문이다.

시간은 빨리 달려서 생기지 않는다

여기서 흔한 오해를 짚어야 한다. 시간을 만든다고 하면, 사람들은 더 빨리 달리는 모습을 떠올린다. 더 빠른 칩, 더 높은 클럭, 더 많은 전력. 그러나 그 방식에는 한계가 있고 대가가 따른다. 빨리 달리려면 더 많은 연료를 태워야 하고, 더 뜨거워지고, 더 무거워진다.

크라우니가 시간을 만드는 방식은 정반대다. 시간은 더 빨리 달려서 생기는 것이 아니라, 만들지 않아서 생긴다. 코드 한 줄을 덜고, 의존성 하나를 끊고, 불필요한 절차 하나를 없앨 때마다 그 빈자리가 곧 시간이 된다. 달리기를 빠르게 하는 대신, 달릴 거리를 줄이는 것이다.

한선씨와 셀코어 — 덜어내는 기술

이 철학은 크라우니가 쓰는 도구 자체에 새겨져 있다. 크라우니는 한선씨라는 한국어 프로그래밍 언어를 쓴다. 한선씨는 4상균형3진이라는 독특한 셈법 위에 서 있는데, 핵심만 말하면 같은 일을 더 적은 부품으로 해내도록 설계되었다는 점이다.

그리고 셀코어라는 규칙 기반 에이전트가 있다. 요즘 세상은 무슨 일이든 거대한 인공지능 여러 종을 불러다 쓰려 한다. 거대한 모델은 거대한 전기와 거대한 비용을 먹는다. 크라우니는 묻는다. 정말 그렇게 커야 할까. 많은 일은 사실 명료한 규칙 몇 개와 작은 모델로 충분하다. 셀코어는 거대한 인공지능이 하던 일을 작은 규칙으로 극소화한다. 코끼리를 부르는 대신, 정확히 필요한 만큼의 손을 쓰는 것이다.

덜어낸 자리에서 시간이 자란다

전기는 캐면 줄어든다. 한 번 태운 연료는 다시 쓸 수 없다. 그런데 시간은 묘하게도 덜어낼수록 늘어난다. 코드를 줄이면 그만큼 빨리 돌고, 빨리 돌면 사람이 덜 기다리고, 덜 기다린 만큼 시간이 사람에게 돌아온다.

그래서 크라우니의 작업실에서 가장 자주 던지는 질문은 무엇을 더 넣을까가 아니라 무엇을 덜어낼 수 있을까이다. 더하는 일은 쉽고 빛나 보인다. 덜어내는 일은 어렵고 잘 보이지 않는다. 그러나 시간을 만드는 쪽은 언제나 덜어내는 손이다. 다음 장에서는 이 덜어냄이 에너지의 차원에서 얼마나 큰 발전소가 되는지를 보겠다.


일반 · CHAPTER 03

만들지 않은 발전소 — 가장 깨끗한 에너지

이 책에서 가장 큰 발전소는 어느 그림에도 등장하지 않는다. 짓지 않았기 때문이다. 짓지 않은 발전소가 어떻게 가장 큰 발전소냐고 물을 수 있다. 그 역설이 이 장의 전부다.

절약이 생산보다 크다는 산수

절약이 생산보다 크다는 말은 듣기 좋은 구호처럼 들리지만, 사실은 차가운 산수다. 1킬로와트의 전기를 캐려면 그만큼의 연료를 태워야 하고, 그 과정에서 절반쯤은 열로 새어나간다. 발전, 송전, 변환의 모든 단계마다 손실이 따라붙는다. 어떤 발전소도 효율 100퍼센트일 수 없다.

그런데 단 하나, 효율 100퍼센트인 에너지가 있다. 쓰지 않은 에너지다. 쓰지 않은 1킬로와트는 손실이 0이다. 태울 일이 없으니 새어나갈 일도 없다. 그러므로 가장 깨끗하고 가장 효율적인 에너지는 캐낸 에너지가 아니라 아낀 에너지다.

크라우니의 에너지는 캔 것이 아니라 아낀 것이다

이 관점으로 보면 크라우니가 하는 일이 다시 보인다. 가벼운 브라우저는 같은 화면을 더 적은 전력으로 그린다. 셀 기반의 운영체제는 켜질 때 더 적은 자원을 쓴다. 한선씨로 짠 가벼운 프로그램은 같은 일을 더 적은 연산으로 끝낸다. 셀코어가 거대한 인공지능을 작은 규칙으로 대신할 때, 그 거대한 모델을 돌리는 데 들었을 막대한 전기가 통째로 절약된다.

세상은 인공지능 시대의 전력 소비를 걱정한다. 거대한 모델 하나를 학습시키고 돌리는 데 드는 전기는 작은 도시의 소비량에 비할 만하다. 크라우니의 대답은 더 깨끗한 발전소를 짓자가 아니다. 그만큼 거대한 모델이 정말 필요한지 먼저 묻자는 것이다. 필요 없는 거대함을 덜어내면, 그 자리에서 캐지 않아도 되는 에너지가 태어난다. 짓지 않은 발전소란 이런 뜻이다.

두 자원의 결정적 차이

여기 시간과 에너지의 아름다운 비대칭이 있다. 전기는 캐면 줄어들지만, 시간은 덜어낼수록 늘어난다. 이 두 문장은 같은 동전의 양면이다. 우리가 코드를 덜고 모델을 줄이고 절차를 없앨 때, 한쪽에서는 태우지 않은 에너지가 절약으로 쌓이고, 다른 쪽에서는 기다리지 않은 시간이 사람에게 돌아온다. 한 번의 덜어냄이 두 가지 선물을 동시에 낳는다.

가장 깨끗한 것의 역설

그래서 이 책은 자랑할 만한 거대한 시설을 내보이지 않는다. 우리가 가장 자랑스러워하는 것은 짓지 않은 것, 태우지 않은 것, 만들지 않은 낭비다. 만들지 않은 낭비가 가장 깨끗한 에너지다.

물론 여기서 멈추면 이것은 그저 효율의 이야기일 뿐이다. 절약 자체가 목적이라면, 아낀 시간과 에너지를 곳간에 쌓아두는 구두쇠의 이야기로 끝나고 만다. 가벼움도 빠름도 절약도, 그 자체로는 아무 뜻이 없다. 아낀 1초와 1와트가 어디로 흐르는가, 그것이 전부다. 다음 장에서 그 방향을 이야기한다.


일반 · CHAPTER 04

사랑 — 시간이 흐르는 단 하나의 방향

여기서 도구 자랑은 멈춘다. 지금까지 우리는 가벼움과 빠름과 절약을 이야기했다. 그러나 그 모든 것은 수단일 뿐, 그 자체로는 아무 의미가 없다. 빨라진 기계로 더 많이 일하고, 아낀 에너지로 더 큰 욕심을 채운다면, 우리는 한 걸음도 나아간 것이 없다.

아낀 1초와 아낀 1와트가 어디로 흐르는지가 전부다. 그리고 크라우니의 대답은 처음부터 정해져 있었다. 캔 시간은 곳간에 쌓는 것이 아니라 사랑으로 흘려보낸다.

돌려받은 하루가 가는 곳

구체적으로 그려보자. 크라우니집사가 교사의 잡무를 먼저 치워주면, 선생은 그만큼 더 오래 아이 곁에 앉아 있을 수 있다. 가벼운 도구로 부모가 저녁의 한 시간을 돌려받으면, 어머니는 그 시간에 아이의 하루를 들어줄 수 있다. 되찾은 시간의 목적지는 더 많은 생산이 아니라 더 깊은 돌봄이다.

절약된 에너지도 마찬가지다. 태우지 않은 힘은 메마른 땅으로 흐를 수 있다. 사막에 물을 대고, 전기가 귀한 마을에 작은 빛을 켜고, 가장 끝에 선 사람들의 손에 가벼운 도구 한 대를 쥐여 준다. 크라우니의 미션이 그리는 큰 그림 가운데 하나는, 망가진 땅을 덜어내어 사막을 초원으로 되살리는 일이다. 그것은 거창한 한 번의 사업이 아니라, 절약된 자원이 매일 같은 자리로 흐를 때 일어나는 변화다.

사막은 큰 비로 초원이 되지 않는다

사막이 초원으로 바뀌는 것은 큰 비 한 번 때문이 아니다. 큰 비는 메마른 땅을 적시기도 전에 흘러가 버린다. 사막을 바꾸는 것은 마르지 않은 물방울이 매일 같은 자리에 떨어지는 일이다. 작아서 무시당하던 1초, 태우지 않아 모인 1와트가 매일 한 사람에게로 흐를 때, 그 자리에서 초원이 돋는다.

이것은 2장에서 본 1초의 산술과 정확히 같은 원리다. 작은 것을 우습게 보지 않는 마음, 그리고 그 작은 것을 매일 같은 방향으로 흘려보내는 꾸준함. 시간을 만드는 일과 사막을 초원으로 바꾸는 일은 같은 문법으로 쓰인다.

누구에게도 무엇을 믿으라 말하지 않는다

크라우니의 미션에는 사람들이 조심스러워할 만한 대목이 하나 있다. 손 내밀면 신을 받아들일 환경을 맺는다는 말이다. 오해를 풀어두고 싶다. 우리는 누구에게도 무엇을 믿으라 말하지 않는다.

우리가 하는 일은 다만 환경을 만드는 것이다. 배고픈 사람은 무엇을 생각하기 어렵고, 글을 모르는 아이는 자기 이름조차 쓰지 못하며, 매일 생존에 쫓기는 사람에게는 고개를 들어 하늘을 볼 여유가 없다. 그 벽들을 덜어내는 것, 손 내밀면 잡힐 자리 하나와 빛이 들어올 작은 문 하나를 만들어 두는 것. 그 문으로 무엇이 들어올지는 그 사람의 몫이다. 우리는 강요하지 않고, 다만 강요받지 않을 만큼의 여유를 그 사람에게 돌려주려 한다. 사랑은 떠미는 손이 아니라 자리를 비워두는 손이다.

흐름에는 방향이 있다

물은 아무 데로나 흐르지 않는다. 낮은 곳으로 흐른다. 크라우니가 만든 시간과 에너지도 아무 데로나 흐르지 않는다. 가장 낮은 곳, 가장 끝에 선 사람에게로 흐른다. 가장 끝에 선 한 아이, 가장 메마른 한 뼘의 땅, 가장 늦게 도착한 한 사람에게로. 이 방향성이야말로 크라우니 미션의 심장이다. 그리고 놀랍게도, 이 사랑의 방향은 다음 장에서 보듯 우리 기계가 기억을 적어두는 주소와 정확히 같은 좌표 위에 놓인다.


일반 · CHAPTER 05

6561 이야기나무 — 사랑이 주소가 된다

이제 이 책에서 가장 신기한 부분에 닿았다. 6561이라는 숫자다. 시험에 나오는 숫자도 아니고, 외울 필요도 없다. 한 그루 나무의 잎을 끝까지 세었더니 마침 6561장이더라, 그 이야기다.

큰 줄기 셋에서 시작한다

나무 한 그루를 상상하자. 뿌리에서 굵은 줄기 셋이 갈라져 나온다. 사랑, 시간, 에너지. 이 책이 처음부터 이야기해 온 세 가지다. 사랑은 모든 것을 흐르게 하는 까닭이고, 시간은 덜어내어 만드는 여백이며, 에너지는 캔 것이 아니라 아낀 힘이다.

줄기 셋에서 다시 가지가 셋씩 돋는다. 사랑의 줄기에서는 돌봄과 회복과 연결이 갈라지고, 시간의 줄기에서는 브라우저와 집사와 운영체제가 갈라지고, 에너지의 줄기에서는 경량과 고속과 절감이 갈라진다. 이렇게 세 줄기에서 아홉 가지가 되고, 아홉 가지에서 다시 잎눈 스물일곱이 돋는다. 여기까지가 3 곱하기 3 곱하기 3, 스물일곱이다.

같은 물음을 다섯 번 던진다

나무가 신기해지는 것은 지금부터다. 스물일곱 개의 잎눈마다 같은 물음을 다섯 번 더 던진다. 그 물음은 늘 셋 중 하나로 갈라진다. 덜어낼까, 지킬까, 맺을까. 씨앗처럼 덜어내 시작할지, 줄기처럼 지켜 자랄지, 열매처럼 맺어 나눌지.

다섯 번의 물음은 점점 구체적으로 좁혀진다. 첫째는 양상을 묻는다. 덜어낼 일인가, 지킬 일인가, 맺을 일인가. 둘째는 대상을 묻는다. 가장 끝에 선 한 아이를 위한 일인가, 곁의 공동체를 위한 일인가, 다음 세대를 위한 일인가. 셋째는 수단을 묻는다. 가벼운 한선씨와 셀코어로 할까, 즉시 켜지는 운영체제와 집사로 할까, 1초로 열리는 브라우저로 할까. 넷째는 리듬을 묻는다. 첫 씨앗 한 번인가, 매일의 줄기인가, 평생의 열매인가. 다섯째는 나눔의 형태를 묻는다. 스스로 자립하게 할까, 곁에 머물게 할까, 사막 너머 세계로 흘려보낼까.

3의 여덟 제곱, 6561

셋씩 다섯 번 더 갈라지면 243가지다. 스물일곱에 243을 곱하면 6561이 된다. 수학으로 적으면 3의 세제곱 곱하기 3의 다섯제곱, 곧 3의 여덟제곱이다. 잎이 정확히 6561장 돋는 것은 그래서다. 억지로 맞춘 숫자가 아니라, 셋씩 여덟 번 갈라진 나무가 자연히 다다르는 잎의 수다.

잎 하나하나는 완결된 한 편의 이야기다. 예를 들어 이런 잎이 있다. 사막 끝의 한 아이가 가벼운 인공지능 교사로 첫 글자를 떼고 제 이름을 스스로 쓴다. 이 잎은 사랑의 줄기에서 돌봄 가지로, 다시 교육 잎눈으로 뻗어, 덜어냄과 맨 끝 아이와 가벼운 도구와 첫 씨앗과 자립이라는 다섯 선택을 지나 맺힌 한 장이다.

잎을 세는 일이 곧 주소를 짓는 일이다

여기서 정말 놀라운 일이 일어난다. 그 잎 하나에는 주소가 있다. 우리 기계가 무언가를 기억할 때 적어두는 메모리 주소와 똑같은 주소다.

셋으로 갈라지는 선택을 여덟 번 하면, 그 경로는 여덟 자리의 부호로 적힌다. 각 자리는 셋 중 하나, 곧 더하기 하나거나 0이거나 빼기 하나다. 크라우니의 기계는 바로 이런 셋값 부호 여덟 개로 메모리 주소를 표현한다. 그 주소가 가리킬 수 있는 칸의 수는 정확히 3의 여덟제곱, 6561이다. 나무의 잎 수와 기계의 주소 수가 한 치도 어긋나지 않고 같다.

그래서 앞의 그 아이의 이야기에는 진짜 주소가 붙는다. 부호로는 OOTAAAAA, 숫자로는 더하기 122번 자리다. 추상적인 사랑의 이야기가 구체적인 기계의 주소 한 칸에 1대 1로 깃든 것이다. 잎을 세는 일이 곧 메모리를 주소 짓는 일이 된다. 사랑과 트릿이 한 나무에서 만난다.

비어 있는 뿌리, 주소 0

나무의 모든 가지를 붙드는 것은 무엇일까. 화려한 잎이 아니다. 비어 있는 뿌리다. 여덟 자리가 모두 0인 자리, 부호로는 OOOOOOOO, 주소로는 0번. 아무 선택도 하지 않은 영점이다.

이 영점이 비어 있어야 나머지 6560개의 잎이 제자리를 안다. 중심이 비어 있어야 둘레가 자리를 잡는다는 것은 오래된 지혜다. 크라우니의 나무도 그렇다. 모든 미션이 시작되는 자리, 그 뿌리는 무엇으로도 채워져 있지 않다. 다만 비어서, 모든 사랑이 그곳에서 뻗어나가도록 자리를 내어줄 뿐이다. 사랑이 자리를 비워두는 손이라던 앞 장의 이야기가, 여기 주소 0에서 다시 울린다.


일반 · CHAPTER 06

맺음 — 오늘, 한 사람의 1초부터

이 책은 끝에서 한 가지를 고백하려 한다. 돌봄과 컴파일러 최적화가 실은 같은 일이었다는 것이다.

낯선 짝처럼 들릴 것이다. 한쪽은 아이를 안고 먹이고 가르치는 따뜻한 일이고, 다른 쪽은 코드를 깎아 가장 빠른 길을 찾는 차가운 일처럼 보인다. 그러나 두 일은 같은 동작을 한다. 군더더기를 덜어내어 본질만 흐르게 하는 일이다.

한 동작의 두 이름

컴파일러를 최적화한다는 것은 프로그램이 같은 결과에 이르는 더 짧은 길을 찾아주는 일이다. 불필요한 단계를 지우고, 돌아가던 길을 곧게 펴고, 막힌 곳을 뚫는다. 그 결과 프로그램은 더 가볍고 빠르게, 더 적은 힘으로 본래 하려던 일을 한다.

아이를 돌보는 일도 그렇다. 좋은 교육은 아이의 머릿속에 무언가를 잔뜩 쌓는 일이 아니라, 아이가 자기 안의 빛으로 나아가는 길을 막던 벽을 치우는 일이다. 글을 막던 문맹의 벽, 배움을 막던 가난의 벽, 자라기를 막던 두려움의 벽. 그 벽을 덜어내면 아이는 스스로 자란다. 가르친다는 것은 채우는 일이 아니라 막힌 것을 치우는 일이다.

코드에서 가장 짧은 길을 내는 일과 아이에게서 글을 막던 벽을 치우는 일은, 그래서 한 동작의 두 이름이다. 둘 다 덜어내어 본질을 흐르게 한다. 이 책이 도구 이야기로 시작해 사랑 이야기로 끝나면서도 한 번도 주제를 바꾸지 않았던 것은 이 때문이다. 처음부터 같은 이야기였다.

다시 처음의 문장으로

그러니 다시 이 책을 연 첫 문장으로 돌아가자. 크라우니가 하는 일의 본질은 시간을 만드는 일이다.

우리는 그 시간을 어떻게 만드는지 보았다. 더 빨리 달려서가 아니라 만들지 않아서 만든다. 코드를 덜고, 의존성을 끊고, 거대한 인공지능을 작은 규칙으로 줄이며 만든다. 우리는 그것이 얼마나 큰 에너지인지도 보았다. 만들지 않은 낭비가 가장 깨끗한 에너지이며, 짓지 않은 발전소가 가장 큰 발전소다. 그리고 우리는 그 시간과 에너지가 단 한 곳으로만 흐른다는 것을 보았다. 사랑으로. 가장 끝에 선 한 사람에게로.

그 모든 이야기가 6561개의 잎에 담기고, 잎마다 기계의 주소 한 칸이 깃들며, 모든 가지의 중심에는 비어 있는 뿌리 하나가 자리를 내어주고 있다는 것도 보았다. 추상적인 사랑이 실행 가능한 좌표가 되고, 차가운 기계의 주소가 따뜻한 의미를 얻는 그 만남까지.

그 문을 여는 1초

그러나 이 모든 이야기는 한 가지가 없으면 그저 종이 위의 그림으로 남는다. 만들어진 시간이 실제로 사랑으로 흐르려면, 누군가 그 흐름을 시작해야 한다. 그 시작은 거대하지 않다. 언제나 작다. 1초다.

당신이 되찾은 1초를 곁의 사람에게 쓰기로 마음먹는 순간, 강은 그 산골짜기의 첫 물방울에서 시작된다. 사막은 매일 같은 자리에 떨어진 물방울로 초원이 되고, 인류의 수천 년은 한 사람의 1초에서 곱해진다. 작은 것을 우습게 보지 않는 마음, 그것이 이 책 전체를 관통하는 단 하나의 태도였다.

그러니 마지막으로 이렇게 적는다. 크라우니가 하는 일의 본질은 시간을 만드는 일이다. 그리고 만들어진 시간은 단 한 곳으로만 흐른다, 사랑으로. 그 문을 여는 것은 거창한 결심도 거대한 시설도 아니다. 이 책을 덮고 자리에서 일어서는 당신의, 오늘 1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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