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학자들은 자주 이름을 붙입니다. 원의 둘레와 지름의 비율을 발견했을 때, 그것을 그냥 "약 3.14159…"라고 부를 수도 있었습니다. 그런데 어느 순간 누군가가 그 수에 이름을 붙였습니다. π, '파이'. 이름이 생기자마자 이 수는 단순한 계산 결과에서 벗어나 하나의 도구가 되었습니다. 파이를 모르는 사람도 "파이만큼"이라는 말로 원을 이야기할 수 있게 되었고, 수학자들은 파이를 한 글자로 써 내려가며 복잡한 공식을 단숨에 정리했습니다. 이름은 도구화의 시작입니다.
또 하나의 수가 있습니다. 연속 복리의 밑, 자연성장의 곡선, 정보이론에서 가장 효율적인 진법의 밑으로 알려진 수. 오일러가 발견하고 e라는 기호를 받은 수입니다. e ≈ 2.71828…
e에 대해 수학 시간에 배운 기억이 있으시다면, 대부분 "복리 계산에 쓴다더라" 혹은 "자연로그의 밑이다" 정도로 알고 계실 겁니다. 그런데 e는 π처럼 널리 불리는 이름을 갖지 못했습니다. 알파벳 소문자 e, 그것이 전부입니다. 이 수를 일상의 말로 부를 방법이 없었습니다.
크라우니 진법은 여기서 시작합니다. 이 수에 이름을 붙이는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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π를 '파이'라 부르듯, 우리는 e를 '크(Cr)' 라 명명합니다.
'크라우니'의 앞 두 글자를 따왔습니다. 영문 약자는 Cr, 크라우니에서 e를 상징하는 기호입니다. 이 수의 역수, 즉 1/e ≈ 0.36788…은 '카(Ka)' 라 부릅니다. 크의 반대, 수축의 보폭입니다.
이름을 붙이는 이유는 단순합니다. 이 수를 매번 "2.71828…"이라고 쓰는 대신, "크(Cr)만큼 팽창했다"고 말할 수 있어야 하기 때문입니다. 크와 카가 있어야 비로소 이 수체계를 언어로 다룰 수 있습니다.
그런데 오일러의 e와 크라우니의 Cr은 수치는 같아도 의미가 다릅니다.
오일러의 e는 시간의 산물입니다. "원금이 연속으로 복리 성장할 때 1년 후 얼마가 되는가"라는 질문의 답이 e입니다. 시간이 흐르면서 연속으로 증가하는 과정, 즉 미분방정식의 해에서 e가 등장합니다. e의 본질은 연속적 시간 속 성장률입니다.
크라우니의 Cr은 다릅니다. 공간의 팽창 규격입니다. 연속적 시간이 아니라, 불연속 양자상태들이 빈틈없이 공간을 채워 나갈 때 충돌도 공백도 없이 배치될 수 있는 임계 보폭이 바로 Cr입니다. 우주가 팽창하면서도 붕괴하지 않는 이유는 무언가가 그 속도를 자연스럽게 조절하기 때문입니다. Cr은 그 조절값입니다.
같은 숫자, 다른 이야기. 그러나 이름을 붙이지 않았다면 이 차이조차 말할 수 없었을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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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법"이라는 말이 나오면 많은 분이 뒤로 물러섭니다. 2진법, 10진법처럼 컴퓨터 수업에서 들었던 딱딱한 개념처럼 느껴지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진법은 본질적으로 이런 질문입니다. "한 자리에서 몇 가지 상태를 구분할 수 있는가?" 10진법은 한 자리에 0부터 9까지 열 가지. 2진법은 0과 1 두 가지. 그렇다면 자연상수 e를 밑으로 하는 진법은? 하나의 자릿수로 정보를 담을 때 가장 효율적인 밑이 e라는 것이 수학적으로 증명되어 있습니다.
단, e진법은 그 자체로 구현할 수 없습니다. e는 무리수라서 정수 진법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크라우니 진법은 다른 길을 택합니다. e의 정수 격자를 사전에 계산해 두고, 연산할 때는 그 격자를 찾아 매칭합니다. 복잡한 부동소수점 계산 없이, 미리 만들어 둔 표를 보고 맞추는 방식입니다. 요리로 비유하면, 재료를 그때그때 저울에 달아 계산하는 것이 아니라, 검증된 레시피에 적힌 "한 컵, 두 숟갈"처럼 미리 정해진 눈금을 쓰는 것입니다.
이름을 붙이는 행위가 없었다면 이 수체계는 수식 안에만 머물렀을 것입니다. 크라우니 진법은 e에 이름을 붙이고, 그것을 격자로 만들고, 다시 언어로 부를 수 있도록 한 계단씩 내려옵니다. 그 첫 계단이 바로 이 장이 하는 일입니다.
이름을 붙이는 것. 그것이 도구화의 시작이고, 선언의 시작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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